시와 좋은글

동양이 무너진 진짜 이유는

송 관 2013. 11. 10. 22:49

1983년 8월 삼성전자의 한 젊은 사원은 동료와

   미국의 새너제이(산호세)로 기술을 배우러 출장을 갔다.

   당시 미국 반도체 기술자들은 세계 최고가 아니던가.

   미국 기술자들은 그를 비롯해 한국인 연구원들을 '캔'이라고 불렀다.

   코리안을 줄여 부른다고 했지만

  '깡통'이라고 조롱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당시 한국 연구원들은

   미국 연구원들이 오후 6시 퇴근하면 그때야 연구실로 들어가

   다음 날 아침 8시 미국인들이 출근할 때까지 일했다.

   숙소도 잡지 못해 회사 정문 앞에 캠핑용 차량을 세워놓고 잠을 잤다.

   당시 이 직원이 지금 삼성디스플레이 김기남 사장이다.

   10년쯤 전 그와 만난 취재수첩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이어져 있었다.

' (반도체 개발을 하면서)

   특히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정말 힘들었다.

   돈은 안 벌어지고,

   개발도 뜻대로 안 됐다.

   회의는 날마다 밤 11시에 했다.

   (반도체 공장이 있는 경기도) 기흥은 정말 시골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었다.

   너무 늦게 끝나니 매일 밤 회사에서 차량을 준비해줬다.

   그런데 꼭 버스 2대에 나눠탔다.

   혹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모두가 큰일 당하면 안되지 않느냐.

   우리는 꼭 반도체를 성공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삼성반도체는

   마침내 1993년 세계 최초로 64D램을 만들어냈다.

   이후 반도체 산업에서

  '최초'를 휩쓸며 가장 창조적인 기업이 됐다.

   김 사장에게 "왜 삼성전자가 성공했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한 걸로 적혀 있었다.

'  회의를 보면 알 수 있다.

   전무부터 대리가 함께 자리한다.

   누구든 반박을 한다.

   서슴치 않는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이런 문화는

   처음부터 우리가 생판 모르는 것(반도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문화였다.

   모르는 것을 가장 빨리하려면 가장 잘하는 사람,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했던 것이다.

   기술 선택을 할 때

   A, B, C 중에서 장단점을 갖고 정확히 토론하고,

   실행에 옮길 때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A를 선택할 때 B, C의 기회 포기 비용까지 검토했다.

   무엇을 잘못한 것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손실까지 검토하는 것이다.

   또 삼성은 기술자, 연구원 외에 매니저도 함께

   고민하면서 의사 결정을 했다.

   엔지니어들끼리 결정하면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웅진, STX, 동양그룹이 잇따라 무너지고 있다.

   한 금융인은 이들 3개 그룹이 무너진 공통점에 대해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 글로벌 경쟁에 나선 게 아니라

   4대 재벌이 하던 사업군(건설·보험·조선 등)에 진출하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전 반도체 신화의 탄생 과정을 반추해보면서

   우리 기업이

   역동성을 잃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도전은 거창한 구호였고,

   결국 '돈 되는 사업'을 따지다가 '돈 번 사업'만 매달렸던 것 같다.

  '창조'란 말이 무서운 단어로 다가온다.